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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클럽(여백 읽기)

(영화 리뷰) 어느 날. 안락사는 아름다운 죽음이 될 수 있을까?

생명을 선택할 권리가 있는가?

 

 

존엄사 혹은 안락사를 둘러싸고 철학적 딜레마는 여전히 풀리지 않았지만, 안락사에 대한 긍정적인 접근이 그 힘을 얻어가고 있는 시대적 흐름은 분명히 감지할 수 있다.

 

아름다운 죽음

 

안락사euthanasia그리스 어원은 ‘좋은 죽음’, ‘아름다운 죽음’을 뜻한다. 그러나 아름다운 죽음이란 과연 존재할까? 이미 네덜란드, 벨기에와 같은 서구 진보적인 국가에서는 조력자살, 안락사 모두 합법화되었고 ‘안락사 버스’가 운행되기도 했다. 심지어 벨기에는 나이제한조차 없애 어린이의 안락사도 허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어느새 도덕적 논의보다는 영화 등 감성적 매체를 통해 ‘웰다잉’이라는 개념을 먼저 심어주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최근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자살, 안락사, 임신후기 낙태 등 생명경시 풍조의 사상적 뿌리는 무엇일까 하는 점이다. 생명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우리의 본능과 양심을 거스르고, 자살을 미화하고 죽음을 선택하게 이끄는 무언의 사상과 문화의 실체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우리의 마음 속 깊은 심리는 무엇일까?

 

내가 보았던 영화들 중 [미 비포 유], 한국영화 [어느 날] 등에서 그려내고 있는 안락사는 적극적 안락사이다. 남은 자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슬픔으로 고통스러워 하지만,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고 기꺼이 도움을 주는 조력자가 된다. 감성적인 영상과 남은 이들을 더 사랑하기 위한 죽음의 선택이라는 메시지는 우리의 가슴을 파고 든다. 그러나 그 사랑스러운 선택 속에는 아주 위험하고 잔인한 칼날을 동시에 지니고 있음을 눈치채지 못한다.

 

안락사를 선택하는 이들. 병들고 연약하고, 나이 든 사람들은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짐이 되는 존재들이라는 아이덴티티를 부여한다. 무서운 것은 이러한 아이덴티티가 사회 속에서 부여받는 것이라는 점이다. 만약 적극적인 안락사가 합법화되고 환자들과 노인들 사이에서 유행한다고 가정해보자. 진정으로 남은 자들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낫다는 시선에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을까? 연약하고 추하며 고통받는, 모두에게 피해만 안겨주는 자신의 생명을 끝까지 붙들고 갈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을까? 또한, 육체적인 고통뿐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자체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광범위한 조력 자살을 부추기지는 않을까? 자살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전문의와 의약품에 의한 쉬운 자살방법으로 비춰진다면?   더 늙고 추하기 전에 자살을 선택한다면? 걷잡을 수 없는 불길처럼 번지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더욱이 의료종사자로서 혹은 보호자로서 양심에 따라 적극적인 안락사에 동의하지 않을 때 법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오히려 그들이 환자의 고통에 눈감는 몰염치한 사람들로 낙인 찍히는 사회가 되지 않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을까?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은 육제척, 정신적인 고통 속에서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고통 없는 육체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어디 단 한 사람이라도 있는가?

 

살 가치가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 

 

더 두려운 것은 다른 사람을 보는 시선이다. 스스로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살 가치가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아닌 사람’을 구분하여 보기 시작할 것이고, 우리 사회는 연약하고 어두운 부분에 빛을 비추어 주는 대신 깨끗하게 청소해버리는 것을 선호하게 될지도 모른다. 고통을 죄악시하고 고통에 대한 내성을 잃어버려 쉽게 죽음을 선택하고 장려하는 사회. 그런 사회로 가는 지름길이 되지는 않을까.

‘모두에게 행복과 이익을 가져다 주는 사람’ 그리고 ‘모두에게 고통과 근심을 가져다 주는 사람’이라는 구분은 어쩌면 공리주의 철학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짐작해본다.

 

제러미 벤담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즉 공리주의적 접근에 의하면 윤리적 기초를 개인의 이익과 쾌락의 추구에 두고, 고통과 쾌락 둘 사이에서 행복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소수의 사람들을 모두의 행복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안락사라는 것은 모두의 고통을 줄이는 매우 도덕적인 결정이라고 평가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진화론적 세계관에서도 안락사는 큰 연결고리를 갖는다. 처음 낙태와 안락사를 주장했던 인물들이 진화론을 지지했으며,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우생학을 옹호했다. 즉 신체장애와 유전적 결함을 가진 ‘열등한’ 사람들을 제거함으로써 인류를 개선한다는 개념이다. 실제로 독일의 진화론자 헤켈은 장애를 갖게 된 성인의 안락사를 선호하기도 했다. 일부 현대 철학자들 사이에서는 어린 아이와 노인을 비인간으로 취급 해야한다는 주장까지 나왔고, 실제로Covid19 팬데믹 이후 청년과 노인 중 살릴 자와 죽을 자를 결정해야 하는 딜레마 속에서 결국 ‘더’ 살 가치가 있는 청년에 손을 들어주었다는 사실도 똑똑히 경험했다.

 

진화론은 가치(형이상학)와 물질적 현실(형이하학)을 분리시킨 칸트의 철학, 그리고 만물의 근원을 물질로 보는 유물론을 근간으로 탄생하였다. 이러한 사상적 체계에 따르면 우리의 인격과 육체는 분리될 수 있고, 육체는 물질에 불과하고 모든 것이 물질로 설명될 수 있다. 사상의 흐름은, 대개 과학기술이 그리하듯 잘못된 목적과 의도의 수단이 되기 시작하면 겉잡을 수 없는 파도가 된다.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세계관 속에서 생명을 존중하고, 나와 모든 인류를 사랑할 수 있을까? 답은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생명이 귀하다는 것은 단순한 ‘주장’이 아니라 전제가 되어야 하며, 절대적인 진리여야 한다고 믿는다. 그 어떤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잣대로 결코 침범할 수 없게 말이다.

 

이와 반대로 창조적 관점에서는 몸과 영혼으로 이루어진 인간은 신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존재이다. 바로 그 자체로 우리의 신분은 신을 닮은 자녀가 된다. 육체와 정신은 따로 떨어질 수도 없고 우위를 정할 수도 없다. 그리고 인간은 그 차제가  ‘목적’이 된다. 또한 인간의 연약함은 도움과 사랑을 구하는 통로가 되고, 쓸모 없고, 비천하고, 연약한 이들조차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한다. 

 

누군가의 연약함, 고통을 통해 위로 받고 삶을 변화시키는 반전을 우리는 무수히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고통 속에서 죽는 삶이라도 생명의 가치 있음의 메시지를 던져줄 수 있지 않을까? 내 생명이 가치 있음으로 비로소 어린 강아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뱃속의 아기, 늙어가시는 부모의 생명이 중요해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생生’을 ‘명命’ 받은 존재들이다.

 

동시에 선물을 받은 자들이다. 수억 분의 일이라는 경쟁을 뚫고 태어나, 사랑으로 성장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calling을 받은 존재들이다. 처음 생명을 선택할 권리가 우리에게 없었듯이, 나와 내 이웃의 생명을 박탈할 권리도 우리는 가지고 있지 않다. 콘크리트를 뚫고 나온 작은 새싹에서, 죽어 있는 대지에서 봄의 기운으로 싹을 틔우는 무수한 생명에서 경외심을 느끼지 않는가?

 

안락사의 의도가 그 아무리 순수하다 할지라도, 적극적인 안락사를 조장하고 미화시키는 문화에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자신의 마지막을 고통 없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는 의료적 연구와 시설, 가족을 위한 사회적인 배려가 먼저 논의되어야 할 대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