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 멋진 신세계(New Brave World) 디스토피아적 미래세계를 그리고 있는 고전문학을 통해 인간 본연의 불안한 감정과 비생산적인 것들을 제거한 완벽한 세상이 과연 인간적인 사회인지에 대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질문을 남긴다.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것
내면의 정체모를 결여감을 느끼는 인물들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의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의 내면과 겹쳐진다. 인위적인 유토피아적 전체주의 사회에서 인간 개인이 포기해야 했던 가치는 알수 없는 가려움 같은 것이었다. 이 가려움은 파멸의 방아쇠이며 유토피아의 몰락을 부르지만 독자에게는 인간 고유의 가치를 찾는 열쇠가 된다. 이 작은 가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완벽해보이는 세계와 불완전하고 혼돈한 세상과 맞바꿔야하는 것을 역설한다. 대의를 위해 소의를 희생시킬 수 있는 것인가? 소의를 위해 대의를 희생시킬 것인가? 인간은 어느 만큼이나 인간일 수 있을까? 소설은 묻는다.

알 수 없는 가려움, 결여
멋진 신세계가 그리는 세상은 Brave하다. 인간 본연의 불안한 감정과 환경이 완벽하게 제거되어 안정된 사회와 물질적인 복지가 완벽하게 구현되는 세상이다. 인간이 공장에서 육체적 조건과 능력이 정확히 계산되어 ‘생산’되고 사회적 ‘역할’이 주어진다. 이를 위해 가족의 연대는 사라지고 모두는 모두의 소유가 되는 개방된 성생활과 인간의 의식을 마비시켜 행복감을 지켜주는 약, 소마(Soma), 그리고 늙지 않는 육체와 평화로운 죽음까지 보장해주는 사회이다. 완벽해 보이는 세상 속에서, 작은 균열은 인간의 마음 속에서 시작된다.
주인공 버나드는 안정적인 자신의 삶 속에서 아이러니하게 고통에 대한 갈망을 표현한다. “과거 자주 (소마나 그 무엇의 도움도 없이) 어떤 커다란 시련, 고통, 박해서 맞서게 되면 어떨까, 심지어 갈망하기 까지 했었다”
완벽한 체제에 적응하지 못해 보이는 사람은 또 있었다. 버나드의 동료 헬름홀츠는 때때로 자신에게 일어나는 동요가 무엇때문인지 알지 못했다. “나에게는 무엇인가 꼭 해야할 중요한 말이 있고 능력도 지녔지만,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그 말이 무엇인지 모르겠고…”. 그리고 소설 속 상위계급의 만인의 연인인 아름다운 여성 레니나 역시 동정과 사랑감정을 느끼지만 육체적 갈구와 정신적 사랑의 차이를 알지 못한채 방황한다.
이렇게 소마와 자유분방한 성생활, 자유, 철저한 계급사회가 주는 안정(최면, 암시, 동일한 신체조건과 알맞은 노동시간)을 즐기는 전체주의적 이상적 사회에서 인간들이 결여되어있던 것은 무엇일까?
이들의 결여는 야만인 존과의 만남을 통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게 된다. 한때 문명인이었다가 야만인 보호구역에서 낙오된 어머니 밑에서 자란 존은 문명사회의 사람들의 만남을 통해 대립된 가치들을 드러내게 해주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 인물이다. 문명사회에서는 끔찍하고도 추악한 자연잉태, 가족, 늙음, 아버지, 어머니라는 말, 신앙.. 이 모든 것들은 더러운 배설물 취급을 받는다.
존이 외우고 있는 셰익스피어의 구절들로 인해 문학적 표현에 대한 갈망을 느끼던 헬름홀츠는 연신 관심을 보였지만, 남녀간의 사랑의 대목에서는 비웃음이 날 뿐이었다. 문학조차 불안정에서 오는 고통의 참맛을 알지 못하는 그들에게 더이상 감동을 주지 못했다. 주인공 버나드 또한 야만인 세상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지만 결국 이상적 세계의 끈을 놓지 못한다. 존은 문명사회와 동화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황무지로 도망치게 된다.
결여는, 시대를 넘어 우리에게도 와있다.
소설 속에 나오는 강제적 전체주의 사회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신은 변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인간이 변한다” 소설 속 메세지는 긴 여운을 남긴다.
어쩌면 우리가 너무 많이 변해버려, 지금까지 이어져온 정신적, 문화적, 언어적 유산에 대한 끈을 놓치고, 인간성은 영영 도서관에 갇힌 유물신세가 되어버릴지도 모르겠다.
신앙을 미개하다고 비웃고, 클래식이 답답하며, 셰익스피어가 더이상 영문학의 정수라고 인정하지않게 된 이유가 어쩌면 허탈하게도 그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들이 되어버렸음을 인정해야 하는 것인가.
모든 정신적 스트레스에서 해방하게 해주는 약물 소마는 소설 속 유일하게 인간 정신을 위해 개발된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고독을 싫어하도록 만들고 그들이 고독을 느끼기가 거의 불가능하도록 삶을 꾸며놓습니다”
이미 우리들 곁에도 가까이 와있지 않을까? 단 1초도 혼자 사유하는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 휴대폰, SNS 중독은 우리를 끊임없이 다람쥐 쳇바퀴 속에 놓아둔다. 행복한 노예들이 사는 멋진 신세계처럼.
이 전체주의 사회를 설계한 사람이 누구든, 이러한 디스토피아적 사회는 이미 우리 눈앞에 찾아왔다. 신우생학을 근거한 유전자 맞춤아이들이 태어나고, 유전자 특성을 근거해 배우자를 찾고, 새로운 인류를 구성해 나가는 멋진 신세계에서 부적격한 인간들을 생산하는 인간들은 야만인, 야생형, 저급한 하급 집단으로 인식될 날이 멀지 않았다. ‘GMO 사피엔스의 시대’의 저자인 생물학자이자 과학작가인 폴 뇌플러에 의하면 지금 우리의 현실은 인류를 맞춤형으로 생산하거나 인구를 통제할 수 있는 기술적 준비가 이미 도래했다고 경고한다. 멀지 않은 미래에, 새로운 인간군상, 즉 계급이 탄생하고 계급이 이동하거나 뒤집어질 일이 거의 없는 견고한 성을 만들어낼 수 있다. 또한 국가적 입장에서는 이러한 우등한 인간군을 많이 가진 국가가 힘을 가지게 될 것이므로 이러한 기술은 예전의 나치의 우생학처럼 독려되거나 의무화될 지도 모르겠다.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 또한 인간고유의 인간성의 발현이 아닌 숫자로 기록된 유전자가 가진 가능성들이 될 것이다.
암시에 갇힌 우리들
소설 속에서 인간의 행복은 안정된 사회, 계급사회를 기반으로 향유되며, 고차원적 정신활동은 철저히 억압된 채 본능에 충실한 행복감에 집중시킨다. 성생활과 소마, 암시, 이러한 인간군상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은 철저히 감시하며 제한을 둔다.
행복한 사회, 행복한 인간에 대한 발상과 관점의 차이가 이러한 사회를 창조시킬 수도 있다. 인터넷, 소셜미디어, 유튜브 끊임없는 자극들은 촉감영화와 소마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가상현실 속 속기 쉽고 조작된 현실을 보는 우리들, 최면과 암시 속에 갇힌 우리들과 같은 모습아닌가? 자신의 성향에 맞는 광고, 콘텐츠를 보고 있노라면 세계는 나와 비슷하고 친숙하며 좁게 느껴진다. 점점 나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사람들끼리 작은 세상들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진짜라 믿는다. 이렇게 진짜 세계와의 연결고리가 끊어지고 진짜 사람들과의 교류를 스스로 끊는다. 적절한 암시와 프로그래밍, 통제 속에서 우리는 속기 쉬운 환경에 스스로 덫을 놓고 들어가 있다.
야만인 존이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왜 당신은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지 않나요?”
우리 모두는 장미꽃이 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장미꽃이 되려한다.
인간역사에 이어지는 다양한 인간군상, 누군가는 거칠고 또 누군가는 온유하며 저돌적이며 순종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려 조화를 이루는 세상 또한 그 안에 불안정성을 내포하고 감내하며, 고통을 극복하고자 노력하고 인내하는 중에 인간성이 발현되는 것은 아닐까.
먼저 인간성의 정수의 표현. 예술. 아름다움을 회복해야 한다. 대부분의 문학은 모순, 역설, 고통의 지성에서 탄생하므로 소마를 멀리해야만 우리에게 이러한 창조의 역사가 일어난다. 기독교 정신 또한 이런 정신적 기반, 희생과 고통의 정신까지 이해할 수 있는 고차원적 정신활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뛰어난 인간이란 결국 무엇인가? 더 키가 크기, 아이큐가 높으며 신체활동이 뛰어난 인간인가. 신우생학적 관점에서는 오히려 그들만의 안경으로 편견을 내보이고 있고 인류전체에 주어진 다양성의 축복을 부인하는 것이다. 위대한 정신은 결코 우전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인내와 고통을 이겨낸 이간에게 주어지는 축복이다. 모든 불완전한 환경요소를 제거한 인간의 최후는 결국 소마를 한웅큼 집어들고 잠에 빠지는 레니나처럼, 위대한 인간성을 발현해보지 못하고 자살을 선택한 영화 ‘가타카’의 제롬의 운명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인간이 인간다워지려면 어쩌면 어느정도의 디스토피아적 환경이 필요한 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 인간 역사에서 끊임없는 계급 투쟁, 사회불안, 전쟁이 계속 되고 있지만, 이 모든 요소들을 말끔히 제거하려면 인간성도 함께 사라져야 하는지 모르겠다. 선과 악이 유기체처럼 함께 움직이듯 행복과 불안, 고통도 함께 유기체처럼 움직이고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의 삶은 고통으로 시작하여 고통의 연속이지만 진통과 같이 한시적이며 끝에는 기쁨이 따른다는 믿음을 가진다면, 끔찍한 유토피아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장미꽃이 될 수 없더라도, 우리 모두는 사랑 받을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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