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북클럽(여백 읽기)

(영화 리뷰) 기생충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을 보고 생각하고 느낀 것. 

넘지 말아야할 선

 

보이지 않는 계급과 그에 따른 불안의식은 영상매체에서 주로 ‘계단’으로 시각화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계단은 그러므로 상징적이며 의미심장하다. 봉준호 감독은 이 영화를 설명하면서 ‘자본주의’의 현실과 문제에 대해 말하고자 했다고 했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계급문제나 불평등의 문제는 비단 자본주의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문제는 인간의 역사에서 단 한번 지워보지 못한 어쩌면 인간사회 본연의 문제라하는 것이 옳을 수도 있겠다.

토지를 매개로 주종관계의 신분제도를 형성했던 봉건사회는 말할 것도 없이, 인간 평등에 반하는 계급과 사유재산 소멸을 이상으로 한 공산주의조차 실제로 지배 공산당 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나뉘어, 계급간 불평등과 고통은 인류와 떨어져 본 적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느 시대를 살든 이러한 계급이 반지하층으로, 지상으로 올라가기도 하지만, 그 계급의 이동에는 항상 피의 댓가가 따른다. 역사가 증명하는 일이다. 지배계층은 넘지 말아야할 선을 만들고, 그 선의 무게가 감당하기 힘들수록 그 선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힘도 커진다. 반지하집 아버지 기태는 무계획으로 일관하는 자포자기에서 희망으로, 욕심으로, 모욕감으로, 절망으로, 분노로 감정이 이동한다. 그 변화의 소용돌이에서 무너진 구조는 모두의 층에서 죽음을 불러오게 된다.

이 영화 속에서 자본과 행복은 역피라미드로 상층에서 하층로 수혈되는 구조이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이러한 구조는 박사장의 집처럼 단단하다. 역류는 물에 잠긴 기정의 화장실 변기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며, 피라미드 인디언 텐트 앞 끔찍한 피의 결과로 점철된다. 각 층의 인물이 바뀔지는 몰라도, 그 집의 구조는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건축가의 세심한 설계대로 허물어지지 않는 구조. 그 집은 무너뜨릴 수 없는 견고한 체제이며, 우리는 답답한 공기의 무게와 슬픔을 동시에 느낄 것이다. 비록 기우의 꿈대로 그 집을 사서 지상층에 살게 된다고 해도 부조리는 끝나지 않을 것만 같다.

이 영화는 계급투쟁을 연상시키고 미화한다는 비판에서 영원히 자유롭지는 못하겠지만, 어쩌면 혁명의 대상이 모호해짐으로써 이미 힘을 잃어버린 혁명, 역류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 봉준호 감독의 의도와 가깝지 않을까 생각한다. 무너뜨려야 할 대상이 이미 천사같은 엄마의 모습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더욱 절망적이기 때문이다.

 

모스부호

 

자신의 존재조차 없는 것처럼 취급되는 지하 문광의 남편이 그토록 필사적으로 보낸 모스부호는 무엇이라 말하고 있었을까? 자신을 꺼내달라고 몸부림치지만 결국 숨어야할 존재 아닌가? 기생충처럼 기생해야하는 존재가 아닌가? 그러한 존재이지만 끊임없이 온 염원을 다해 메세지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눈치도 재지 못하는 박사장처럼 우리 사회의 소외된 공간에서 구조요청을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우리는 듣지 못하고 있다. 그들을 눈치채지 못하고, 혐오하는 것은 결국 불안정한 미래를 예고할 것이라는 감독의 모스부호는 아닐까.

자본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시민의식과 기독교적 윤리가 무너지고 있는 현실에서, 모두가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힘이 철저히 힘을 잃어버리고 있는 현실에서, 자본주의의 폐해를 진단하고 고칠 수 있는 사람들은 누가 되어야하는가? 이 빈 공간에 들어온 것이 포스트모더니즘, 프랑크프루트 학파, 해체주의, 사회주의가 된 것이 아닌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 자리를 잡고 들어와있는 그 사상들을 우리가 존재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절망적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에 대한 책임의식을 잃어버린 우리들은 언젠가 그 사상들에 자리를 내어주게 될 것이다.

 

햇빛은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있어야 할 것

 

기우의 집으로 찾아온 햇빛의 양과 박사장의 집으로 찾아온 햇빛의 양은 같을까. 다를까. 생각과 관점의 차이로 결국 우리는 답할 수 밖에 없다.

반지하방과 거실이 통유리로 활짝 트인 물리적 공간에서 우리는 햇빛의 축복조차 불평등하게 느껴진다. 내게 공평하게 찾아오는 햇빛은 기우에게 꿈이고 희망이다. 그가 돌에 집착한 것처럼, 햇빛에도 집착할 수 밖에 없다. 비를 낭만으로 즐길 수 있는 사람들과 비가 재앙이 되는 사람들은, 평소에 그들이 받는 햇빛의 양의 차이로 인해 발생한다.

봉준호 감독은 여러번 이 영화는 자본주의에 대한 영화라고 했다. 그가 몸담고 있는 그러므로 그가 가장 잘 알고 부조리한 자본주의의 모습을 가장 잘 담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 했지만, 이 구조적 답답함은 오직 자본주의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영화가 중국에서는 상영금지 되었다는 것은 그것을 뒷받침한다.

앞에서 말했듯, 이것을 체제가 아닌 인간 본연의 문제로 본다면 이것을 ‘권력’의 관점에서 풀어보고 싶다. 엘빈토플러가 설명하듯, 이전에는 폭력에서 성취된 권력이, 이제는 돈에서, 지식으로 이동하고 우리는 한정된 자원을 가짐으로써 권력을 가진다. 인간이 권력을 가졌을 때, 우리는 그것을 움켜쥐고 확고하게 하며 확장한다. 소외는 그것의 부산물이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능력도 있고, 일도 하고자 했던 반지하 가족은 무엇때문에 소외되었을까? 그들은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오늘날 우리에게 부조리하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대부분 인간 본연의 죄에 기인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포장하고 피해자를 자극하고 체제로 눈을 돌리게 하는 시도를 자주 접한다. 누구나 공평하게 기회를 갖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데, 공평한 결과를 얻는 사회는 있음직하다. 결과는 끔찍할 것이지만 말이다.

소외자들은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에는 크게 두 가지 관점이 존재한다. 많은 박사장을 만들어 그가 만들어내는 부를 부산물처럼 그 밑의 사람들도 받을 수 있게 하는것. 다른 것은 박사장의 돈을 떼어 가난한 사람들을 교육시키고 지원하여 잘 살게 하는 것. 이상적인것이 늘 실제적으로 효과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햇빛은, 어디에나 누구에나 있어야 할 것이라는 명제에는 반론의 여지는 없다. 그러나 그 빛의 양은 처음부터 같다고 믿을 수 있는 사회인지에 대한 물음에는 우리는 쉽게 답할 수 없다.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가난하고 소외한 자의 죄는 용서받아야하는가. 용서받아야 마땅한가?

예전 영화들은 나약한 인간의 단면을 보여주고 그것을 극복하고 결국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면 요즘 영화들은 그 나약하고 소외되고 상처된 마음과 그것이 죄를 정당화하고 동정의 시선을 요구한다. 영화 [조커]에서도 그러한 면을 잘 보여준다. 양심보다는 동정, 죄악의 판단보다는 눈물을 요구한다. 그들의 분노의 횟불을 받으라고 요구한다. 같은 마스크를 쓰고 불을 지르고 차위로 올라가 광기어린 자신의 절망적인 현실을 부정하고 뒤엎으라고 한다. 그러나 애꿏은 피해자들은 사실 자신의 주변 사람들일 뿐이다. 자신을 무시했던 사람들. 그들일 뿐이다. 결국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하고 끝날 불장난같은 것이다.

기생충에서 박사장을 죽인 기택과 지하 2층의 사람들을 죽이려 돌을 들고 내려간 기우는, 동정받아야하는가? 그들이 꾸며내는 거짓말들은 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고 정당화 될 수 있는가?

‘있는 것들의 것을 뺏어야해. 그들 것은 아무 양심없이 뺏어도 돼’ 기저에 깔려있는 그 비양심은 실로 무서운 것이다. 이 영화가 어딘가에 상영금지가 됐다면 이러한 도발적인 생각의 폭력이 숨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전에 미셸 오바마의 초상화를 그릴 화가로 선택된 에이미 셰럴드는 흑인이 백인의 머리를 잘라 들고 있는 그림을 그린 사람이다. 과연 그 반대라면? 백인들이 흑인들의 머리를 들고 있는 그림을 그린 화가가 있었다면 과연 영부인의 초상화를 그릴 사람으로 적합하다고 공감을 받았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피 지배계급이었던 흑인들은 이제 마음껏 그 반대로의 폭력을 휘둘러도 박수받는 시대가 되었는가?

피해자는 당연히 가해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가 가난하더라도 아무리 깊은 상처가 있더라도 우리는 동정해서는 안된다. 그가 회개하고 돌아서기 전까지.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순간 우리 모두는 같은 마스크를 쓰고 양심의 불을 끄고, 진리의 햇살에 대한 창문을 닫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법만이 우리에게 죄의 심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진리는 변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 그것은 아름다운 동정이야기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받아들여야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햇살처럼,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다가오지만 우리의 욕심으로 그것은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들어냈다면 우리는 그들을 구제하고 연민해야 할 것이다.

옳고 그른 것은 변하면 안되는 것이다. 이 계급에서 옳지않았던 것이 그 반대가 되어 옳게 되는 세상에 사는 이 시대는 정의로 관점과 문화에 따라 새로 정의되는 포스트모더니즘에 살고있다. 지금의 시대는 과연 무엇이라 말할 수 있는가? 법과 정의가 변하는 시대가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시대. 사상과 철학에서 떠나 모든 기준이 자신의 편의로 바뀌고, 공의와 정의가 개개인의 경험으로 바뀌고 둔갑하고, 그것이 소수일지라도 다수에 폭력으로 강요하는 시대. 공의와 공평은 실로 진리가 아니라면 누군가에게 폭력으로 다가올 수 있다. 우리의 편의에 따라 성경도 해석하는 시대가 되어버렸으므로, 상대적 진리, 상대적 정의, 상대적 양심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흐름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기생충은 프랑스에서 그리고 미국에서 주목받은 것이 이례적이 아니다. 예전 68혁명이 마오에서 유럽에서, 미국에 건너갔듯이 그들은 열광하고 싶은 새로운 마오를 찾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모든 금기하는 것을 금기하는 것. 그것이 그들의 사상적 슬로건이었다.

사람들은 연약해졌고 믿음을 약화되었다. 자신의 정체성은 가상현실의 인스타그램 속 ‘좋아요’에 지배되는 세상에서 불안하고 외롭다. 양심에서는 자유로와졌지만, 그들이 무의식에서의 죄로부터의 억압이 더 크다는 것은 깨닫지 못한다. 이들은 이상을 꿈꾸고 종교적이지 않은 현실의 모습을 한 구원자, 그리고 정의로운 심판자를 끔직이도 원하고 있다. 혁명의 횟불을 든 누군가를.자신이 Politically Correct하다고, 자신들이 믿고 있는 것이 옳다고 해주는 존재말이다.

파괴하고자 장벽과 선을 무너뜨리고 우리는 다시 하나가 되어 바벨탑을 만들고자 한다. 윤리와 도덕에 관한 선도 모두 넘어 파괴하고 있는 작금의 시대에서, 하나로 모이는 에너지는 오직 이것을 향하고 있다.

 

결국 기생충은 누구였을까?

반지하 그들은 지하를, 지하에서는 반지하의 그들, 왜 그들은 서로 죽이려 했을까. 그리고 결국 대상은 지상을 향한다. 지하에서는 현실에 순응하고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 부동의 인간들이다. 변화를 받아들이지도 맞서지도 않는다. 반지하 사람들에게 분명 그들이 기생충으로 보일 것이다.

반대로는 그들의 익숙한 체제를 흔들고 그들의 공간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침입자야말로 기생충이다. 지상의 입장에서는 그 둘다 일것이다. 반대로, 박사장은 없는 사람들의 부를 독점하는 기생충으로 보여질 것이다. 가장 반대로의 흐름은 반지하가 지상의 존재를 죽인것이다. 두 체제를 죽이고자 한 굉장히 혁명적이고 상징적 존재다. 그들이 주인공이여만 하는 것이다.

시상식에서 제작진은 여러번 ‘굉장히 시의적절하고 상징적이다. ‘라는 말을 반복했다. 이 말이야말로 상징적인 것이다. 메세지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혁명의 대상, 파괴의 대상이 명확히 보이지 않는 복잡한 사회속 그 경계와 차이는 더욱 확고해지고 앞으로 더 두터워질 지 모른다라는 두려움, 사회적 주체자들의 불안이다.

아카데미상 심사위원단은 그동안의 ‘로컬 시상식’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로 채워졌다. 그러나 다양성을 제고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노선은 확실해보인다. 흑인 남성의 섹슈얼리티를 담은 문라이트, 비인간과의 사랑의 담은 셰이프 오브 워터, 흑인 보스와 백인 드라이버를 그린 그린북. 다양성을 앞세운 프로파간다.

예술은 늘 말하려는 자의 폭발적 에너지를 근간으로 하므로, 예술이 늘 나의 관점을 대변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새로운 것, 선을 넘는것, 부수는 에너지, 그것이 예술의 아름다움 뒤에 숨겨진 힘이다. 세상의 금기는 다양하므로, 그 만의 시대적 정의와 신앙적 율법을 포함하는 모든것은 언젠가 예술의 얼굴로 파괴될 것이다. 파괴하고자 할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의 정신은 아직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우리에게 찾아왔다. 그 문화는 이제 소비하는 데에서 넘어가 우리가, 한국이 그것을 만드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것이 기생충이 우리에게 주는 상징적 의미다.